백선엽 장군에 대한 논란이 있다. 1920년생 백선엽 장군이 2020년에 100세를 넘긴 상황에서 그가 죽었을 때 어느 곳에 묻힐 것인가에 대한 논란이 바로 그것이다. 한쪽에서는 6.25 전쟁에서 북한의 침략을 막아내고 전공을 세웠기 때문에 국립묘지에 안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고, 다른 한쪽에서는 해방 이전 일본군(간도특설대)에 복무하면서 독립군을 토벌하는 데에 앞장을 섰으므로 국립묘지에 안장할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사실 이 문제가 논란이 되는 것이 백선엽이라는 개인이 중요한 인물라서가 아니다. 백선엽이라는 인물의 ‘역사적 행보’에 대한 평가가 ‘대한민국의 역사에 대한 평가’와 그 궤를 같이하고 있기 때문에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백선엽 장군이 해방 이전 만주의 간도특설대에서 활동했다는 것은 이미 밝혀진 사실이다. 1938년에 창설된 간도특설대는 만주로 이주한 조선인들로 구성된 부대였으며, 이 부대의 창설 목적과 주된 활동은 항일무장세력(주로 동북항일연군)에 대한 탄압이었다. 박정희, 신현준, 김석범, 김대식 등 한국 근현대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인물들도 간도특설대의 구성원이었다. 이 간도특설대의 만행에 대해서는 많은 역사자료 및 저술 등에서 다수 확인할 수 있다. 간도특설대의 모든 구성원과 모든 만행을 고발할 수는 없겠지만, 간도특설대에 복무한 자는 장교부터 사병까지 전원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다는 점을 이해한다면 이들이 민족의 독립과 해방에 어떤 역할을 했었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참고로 일본군에 복무한 자는 소좌 계급 이상의 자만 등재를 해놓았다).
백선엽은 해방 이후 조만식의 비서로 활동하다가 월남하여 군사영어학교 1기생으로 입교한다. 1946년 임관한 백선엽은 1950년 1사단장으로 취임하였다. 백선엽의 전쟁수행능력과 전후 대한민국에서 그의 역할은 적지 않았던 것 같다. 그는 치열했다고 알려지는 다부동 전투에서 제1사단장으로서 부대를 적극적으로 지휘했고, 그의 부대는 인천상륙작전 이후 평양에 입성한 첫 번째 부대가 되었다. 백선엽은 1951년 지리산 빨치산 소탕을 위해 야전사령부를 구성하는데, 이를 모태로 한국군 2군단을 창설하게 된다. 1952년 32세의 나이로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되었고, 1953년에는 대한민국 국군 최초로 4성 장군으로 취임하게 된다. 1960년에 퇴역한 백선엽은 대만, 프랑스 대사를 역임하고, 이후 박정희 정권에서 교통부 장관을 지냈다. 경제계에서의 활동도 왕성해서 충주비료 사장, 한국종합화학공업 사장, 한국에탄올 사장, 비료공업회 회장, 한국화학연구소 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그의 일대기를 보고 있자면 그가 가지고 있는 개인적인 능력이 뛰어나다고 평가할 수밖에 없어 보인다. 어쩌면 시류에 영합하는 것도 능력일 것이고, 전쟁에서 보여준 군인으로서의 능력도 뛰어난 것으로 보인다. 전쟁 중에는 진급이 빠를 수밖에 없다는 점을 아무리 고려한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젊은 나이에 빠른 진급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은 그의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다. 어쨌든 그는 대한민국 최초의 대장이 되었고, 전쟁 이후에도 외교관과 경제인으로서 폭넓은 활동을 보여주었다. 그는 국내에서 금성태극무공훈장, 을지무공훈장, 충무무공훈장, 금탑산업훈장을 받았고, 미국의 은성무공훈장, 캐나다의 무공훈장 등 다수 포상을 받았다. 그는 다수의 무공훈장을 받음으로써 대한민국의 군인으로서 충분한 영예를 누렸다. 군에서 예편한 이후에도 그는 대한민국에서 높은 사회적 지위를 차지했고 국가의 원로로서 대우를 받았다. 위에 열거된 여러 사실들만을 놓고 보더라도 그가 대한민국에 대해 행한 기여는 이미 충분한 평가를 넘어서 상당한 보상을 받았다고 생각된다.
그의 공로와 기여가 상당한 보상을 받은 것과는 다르게 그의 민족적 배신행위에 대해서는 아직 적정한 평가를 받지 못한 것 같다. 해방 이후 반민특위가 무력화됨으로써 그의 과오가 단죄될 기회를 잃어버렸고, 한국전쟁 이후 남북의 극렬한 이념대립의 상황 속에서 그의 반민족행위에 문제제기를 할 수 있는 기회는 전혀 주어지지 않았다. 반세기가 지난 2009년 민족문화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 그의 이름이 등재된 것이 어쩌면 최초의 공식적 평가일지도 모르겠다.

그는 그의 자서전에서 이렇게 기술했다고 한다.

“우리가 전력을 다해 토벌했기 때문에 한국의 독립이 늦어졌던 것도 아닐 것이고, 우리가 배반하고 오히려 게릴라가 되어 싸웠더라면 독립이 빨라졌다라고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동포에게 총을 겨눈 것이 사실이었고 비판을 받더라도 어쩔 수 없다.”(위키백과 재인용)

비록 자신의 삶에 과오가 있기는 하지만 대수롭지 않다는 표현이다. 역사라는 큰 물결 앞에 자기의 부끄러운 삶을 해명하고 합리화하려고 시도를 했지만, 그렇다고 역사와 민족 앞에 당당할 수는 없을 터이다. 최대한의 선심으로써 해방 이전에 그의 행적에 대해서 용서를 한다고 하더라도, 그 전제는 그의 진정한 사과와 반성이 앞서야 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백선엽 장군은 반성은커녕 ‘비판을 받더라도 어쩔 수 없다’고 했다. 어떠한 속죄와 용서에도 불구하고 그 과오가 역사에서 지워지는 것은 아닐진대, 하물며 역사와 민족 앞에서 진정한 반성은커녕 어처구니없는 태도를 보며 참 뻔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한국전쟁을 치르고 냉전시대를 거치면서 ‘자유의 수호자’로서 지나치게 떠받들어진 감이 없지 않다. 보수를 자처하는 세력의 입장에서도 백선엽을 국가적 영웅으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로 다가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떠한 방법으로든 백선엽의 민족적 배신행위를 덮지 못한다면, 그와 유사한 행보를 보였던 박정희 전 대통령의 파묘까지도 거론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치적으로 보수를 표방하는 인사들에게 있어서 이것은 절대로 마주하고 싶지 않은 상황일 것이다.
백선엽이 인생의 말미에 이르러 국립묘지의 안장이라는 결과로 인생의 방점을 찍으려 한다. 그러나 속죄와 용서도 없는 그가 국립묘지에 안장될 수 있다고 하면 그것은 민족정기의 심각한 훼손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의 역사적 과오를 모두 씻어주는 면죄부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대한민국에 어떠한 공을 세웠다 하더라도,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은 대한민국이 민족에 반역하고 역사 앞에 사죄하지 않는 그에게 면죄부를 줄 수는 없는 일이다. 따라서 그가 대한민국의 국립묘지에 안장되는 일은 결코 정당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얼마 전, 정신없는 안철수 대표가 홍범도 장군과 백선엽 장군을 등치시켰다. 홍범도가 영웅이면 백선엽도 영웅이란다. 어떻게 대한민국의 리더가 되겠다는 자가 ‘민족에게 목숨을 걸고 총부리를 겨눈 백선엽’을 ‘민족의 진정한 영웅 홍범도 장군’과 등치 시킬 수 있는지 모르겠다. 오히려 (보수적인 관점에서) 공과 과가 분명한 김원봉과 백선엽을 비교하는 것이 더 적합해 보인다.
‘해방 이전 독립군을 탄압하며 민족에 총부리를 겨눈 백선엽’과 ‘일제가 치를 떨 정도의 독립운동을 하고 해방 이후 북한으로 들어간 김원봉’의 공과 과는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해방 이후 한국전쟁을 통해 같은 민족에 총부리를 겨눈 김원봉을 용서할 수 없다면, 해방 이전 민족의 독립에 평생을 바친 분들에게 총부리를 겨누었던 백선엽도 용서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한 평생을 부귀와 영화를 누리며 잘 살았다면 그것으로 만족하고 역사에서 조용히 퇴장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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