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틀 사이에 한국 현대사에서 중요한 인물 두 명의 부고가 전해졌다.

한 명은 인권운동 및 시민운동에 힘을 쓰고 정치인으로 왕성하게 활동하던 현직 서울시장의 갑작스러운 생의 마감이고,

다른 한 명은 식민시절 일제에 부역하고 해방 이후 한국전쟁에서 전공을 세운 전직 육군대장의 천수를 다 한 죽음이다.

아마 오늘부터 대한민국은 이들의 죽음으로부터 한동안 자유롭지 못할 것 같다.

 

이 중에서 박원순 서울시장의 부고 소식은 나에게 적지 않은 놀라움으로 다가왔다.

 

2020년 7월 10일 저녁.

인터넷에 박원순 서울시장이 실종 상태라는 속보가 올라왔고, 그 뉴스가 나를 적지 않이 불편하게 만들었다. 속보라서 무슨 상황인지 상세하게 소식을 전달해주지는 않았지만, ‘무슨 일이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큰일이 발생하지 않기를, 그리고 무사히 돌아와서 아무 일 없었다는 해명이 올라오기를 바랐다. 하지만 저녁 일을 마치고 날 즈음 박원순 시장이 야산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는 뉴스가 올라왔다. 올라오는 후속 기사에서는 박원순 시장이 전 비서를 지속적으로 성추행을 해왔고 이에 피소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순간 당혹스러움과 황망함, 안타까움 등 많은 복잡한 감정이 휘몰아침을 느꼈다.

 

20-21세기 대한민국의 국민이라면 ‘박원순’이라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인권변호사로서 활동했던 그는 ‘참여연대’, ‘아름다운 재단’ 등의 활동을 통해 시민운동에 거대한 족적을 남긴 사람이다. 그는 2011년 이래로 서울시장을 역임했고, 당연히 차기 대권에 도전할 것이라고 여겨질 만큼 정치적으로도 비중이 있는 인물이었다. 그런 인물이 불현듯 갑자기 인생을 마무리하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는 점이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정치적인 비중을 떠나서 우리 사회에서 신뢰할 수 있을 손 꼽히는 인물 중 하나라고 여겨졌던 사람이기도 했다.

1980년에 사법시험(제22회)에 합격하고 검사로 임용된 이후 권세를 누릴 수 있는 상황이었음에도 그는 시민활동에 투신했다.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던 그는 1986년 ‘부천서 성고문 사건’의 변호인단으로 참여했고, 1993년 ‘서울대 조교 성희롱 사건’을 담당하며 6년의 법정투쟁 끝에 승소를 끌어냈다. 특히 ‘서울대 성희롱 사건’은 성희롱이 사회적으로 불법이라는 인식을 가져오게 되었다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 사건이었다.

1990년대 ‘경실련(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과 함께 중요한 양대 시민단체였던 ‘참여연대’는 권력에 대한 제도적 감시와 더불어 ‘국민생활최전선 확보 운동’, ‘재벌개혁을 위한 소액주주운동’, ‘부패정치인 낙천낙선운동’ 등 여러 가지 창의적인 시민운동을 전개했고, 그 중심에는 박원순이 있었다. 박원순이 사무처장을 맡았던 당시 참여연대의 활동력과 창의성은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키며 커다란 지지를 받았고, 당시의 참여연대는 다른 시민단체들과는 다르게 정부의 보조금이 없이 시민들의 후원금만을 가지고 운영할 수 있는 대한민국 유일의 시민단체였다는 점이 이를 보여준다.

참여연대라는 시민단체의 영향력보다 박원순이라는 리더의 영향력이 더 돋보이는 시점에서 그는 참여연대의 사무처장을 다른 활동가에게 넘겨주었다. 당시 박원순이 없는 참여연대가 가능할 것인가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적지 않았지만, 그의 사임을 통해 다른 시민활동가들이 보다 전면에 나설 기회가 생겼던 것이다. 이후 그는 ‘아름다운재단’, ‘희망제작소’ 등 참여연대의 활동과 중첩되지 않는 새로운 영역에서의 시민운동을 진행하면서 시민운동의 저변을 확대하려고 노력했고, 동남아시아의 시민사회와 국제적인 연대와 활동을 통해 국제시민사회의 역량을 강화하려고 힘쓴 것으로 알고 있다.

평생 인권운동 및 시민운동에 투신하던 그가 정치의 전면으로 나서게 된 것은 2011년의 일이었다.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 사퇴를 한 이후 보궐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시 여당이던 나경원 후보를 누르고 서울시장에 당선되었던 것이다. 후보 등록 당시, 산행을 마치고 내려와서 당선이 유력한 서울시장후보였던 안철수 씨와 독대를 통해 양보를 받아냈던 일화는 적지 않은 반향을 일으켰다. 양보를 해 준 안철수나 양보를 받아 낸 박원순이나 모두 범인은 아니라는 평가가 적지 않았다. 이후 박원순 시장은 재선과 3선을 통해 최장기 재임한 민선 서울시장으로 이름을 올리고 있던 중이었다. 3선을 마지막으로 이후의 행보가 적지 않게 궁금했는데, 그 이후의 행보를 볼 수 없게 된 것도 아쉽게 다가왔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시정활동에 커다란 지지와 응원을 보내주었던 것이 한편으로는 시장으로서의 창의성과 열정에 기반한 것도 있을테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가 일구어 왔던 이와 같은 ‘그의 삶에 대한 신뢰’도 중요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그의 삶이 많은 것을 기록하고 증명하고 있다고 믿던 찰나, 이 세상을 달리 했다는 그의 소식과 그와 관련한 추문은 사람들에게 당혹스러움으로 다가오는 것 같다. 어쩌면 우리가 지금 어쩔 줄 몰라하는 것은 그에 대해서 가졌던 신뢰에 대한 배신감과 허무함으로 황망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황망함을 뒤에 두고서라도 여전히 남는 불편한 응어리가 마음속에 조금 남아있는 것 같다.

 

‘아무리 그래도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할 필요가 있었을까?’

 

정치인들의 추문은 하루이틀의 일이 아니다. 윤창중 전 청와대대변인(박근혜 정부) 성추행 사건, 박희태 전 국회의장의 캐디 성추행 사건,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의 비서 성폭행 사건, 오거돈 전 부산시장의 여직원 성추행 사건 등 2000년 이후에도 이런 일은 숱하게 벌어졌다. 박원순 시장도 다른 이들처럼 언론에 사과하고 재판에서 법의 심판을 받으면 안 되는 것이었을까? 법의 이름으로 심판을 받고 그 앞에서 속죄를 하면 안 되는 것이었을까? 그는 왜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했던 것일까?

 

그가 삶을 마무리하면서 이에 대한 해명을 들을 수 있는 방법은 이제 그 어디에도 없다. 그가 죽음을 통해 찍어 놓은 마침표는 그의 죽음에 대한 해명에 대해서도 마침표이고, 그가 평생을 통해서 했던 이야기들과 그가 앞으로 하고자 했던 이야기들도 모두 마침표인 것이다. 만약 그가 마침표를 찍지 않았더라면 그가 세상 사람들 모르게 저질러 놓았던 인생의 과오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가 만들어졌을 것이고, 마찬가지로 그가 삶을 통해 이룩했던 적지 않은 성과와 업적들 모두 다른 방향에서 해석되고 재평가되었을지도 모른다.그렇다면 그가 지금까지 살아왔던 그 삶의 무게가 한순간의 신기루로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남들과는 다르게 언론이나 법정에서의 몇 마디가 아닌 죽음으로써 속죄를 했었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언젠가부터 너무 많은 정치인들을 잃어버리는 것 같다. 나의 20대에는 한 명의 용감한 전직 대통령을 잃었고, 나의 30대에는 한 명의 멋있는 국회의원을 잃었다. 그들에게 어떤 잘못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들이 죽음을 선택했던 것이 너무 슬프고 서러웠던 기억은 있다. 그러나 지금은 이전과는 조금 다른 감정이 들락거린다. 정황으로 보았을 때 박원순 시장의 추문은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만약 사실이 아니었다고 하면 그가 굳이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할 필요는 없지 않았을까? 혹은 그 이면에는 또 어떤 문제가 있었을까? 어쨌든 그의 죽음이 슬프지만 서럽지는 않고, 안타깝지만 배신감이 느껴지는 복잡 미묘한 감정에 휩싸이게 된다.

 

글 말미에서 밝히지만 ‘좋아했고 많이 의지했던’ 어떤 정치인이 불미스러운 과오로 생을 마감한 것은 사실이다. 단지 내가 바라는 것이 있다면 그를 죽음으로 내몰았던 그의 과오는 명확히 하더라도 그가 죽음으로써 증거한 그의 나머지 인생은 세상 사람들이 건드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너무나도 아쉽지만 어쨌든 나는 어제 한 명의 시장을 잃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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