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낮에는 더위에 에어컨을 틀고 지냈는데,

저녁에 비가 오더니 오늘은 제법 쌀쌀해졌다.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에서 가을 냄새가 묻어 나온다.

 

이번 여름은

무더위, 태풍, 이상기온과 같은 기상 이슈보다는

코로나와 방역에 대한 예민함이 모든 시간을 잡아먹은 느낌이다.

 

가을.

계절이 계절이니만큼 조금은 더 생산적인 시간이었으면 한다.

국가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정권이 바뀐 이후 정부는 지속적으로 부동산 정책을 내놓았지만, 여러 정책에도 불구하고 부동산 가격은 좀처럼 잡히지 않았다. 모 방송사는 보도를 통해 지난 정권에서의 대출규제완화 및 분양가상한제 폐지에 원인을 돌리기도 했지만, 정부의 무분별한 정책남용과 그 정책의 실패도 주요한 원인이라고 생각이 드는 것도 현실이다. 정부는 부동산 시장에 대한 커다란 틀에서의 접근을 보여주지는 못한 것 같다. 오히려 특정 지역의 부동산 가격의 폭등에 대해서 대증적인 정책을 쏟아내었고, 이에 대해 다수의 국민들은 부동산 정책과 그에 부수한 금융정책의 잦은 변화에 불편함을 느끼고 있는 실정이다.

국민의 삶의 근간이 되는 부동산 시장의 왜곡은 결국 국민의 삶에 악영향을 미치게 된다. 특히 우리나라 처럼 국토면적이 제한적이고, 많은 사회적 인프라가 서울과 수도권에 집중되어 있는 상황에서 부동산 가격의 불안정은 국민들에게 삶에 대한 불안함을 야기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부동산이 폭등하는 모양새에 민심이 정권에 등을 돌리는 느낌이다. 다수의 부동산을 보유하고 있는 사람들은 이번 정권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 보겠다는 심산인 듯 하다.

 

지금 정권에 불만을 가지고 있는 입장에서 부동산정책의 실패에 대해서 지금의 정부와 집권여당에게 책임지라는 말은 정치적 수사에 불과할 뿐이다. 또 이미 심판을 받은 지난 정권에서의 부동산정책에 탓을 돌려봐야 그 역시도 의미없는 일이다. 보다 현실적으로는 미래 권력을 담당할 누군가에게 그 대안을 요구해야 함이 타당하다고 생각되는데, 그 어느 정당도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다음 권력이 어디로 가게 될 지 궁금하다.

 

 

이틀 사이에 한국 현대사에서 중요한 인물 두 명의 부고가 전해졌다.

한 명은 인권운동 및 시민운동에 힘을 쓰고 정치인으로 왕성하게 활동하던 현직 서울시장의 갑작스러운 생의 마감이고,

다른 한 명은 식민시절 일제에 부역하고 해방 이후 한국전쟁에서 전공을 세운 전직 육군대장의 천수를 다 한 죽음이다.

아마 오늘부터 대한민국은 이들의 죽음으로부터 한동안 자유롭지 못할 것 같다.

 

이 중에서 박원순 서울시장의 부고 소식은 나에게 적지 않은 놀라움으로 다가왔다.

 

2020년 7월 10일 저녁.

인터넷에 박원순 서울시장이 실종 상태라는 속보가 올라왔고, 그 뉴스가 나를 적지 않이 불편하게 만들었다. 속보라서 무슨 상황인지 상세하게 소식을 전달해주지는 않았지만, ‘무슨 일이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큰일이 발생하지 않기를, 그리고 무사히 돌아와서 아무 일 없었다는 해명이 올라오기를 바랐다. 하지만 저녁 일을 마치고 날 즈음 박원순 시장이 야산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는 뉴스가 올라왔다. 올라오는 후속 기사에서는 박원순 시장이 전 비서를 지속적으로 성추행을 해왔고 이에 피소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순간 당혹스러움과 황망함, 안타까움 등 많은 복잡한 감정이 휘몰아침을 느꼈다.

 

20-21세기 대한민국의 국민이라면 ‘박원순’이라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인권변호사로서 활동했던 그는 ‘참여연대’, ‘아름다운 재단’ 등의 활동을 통해 시민운동에 거대한 족적을 남긴 사람이다. 그는 2011년 이래로 서울시장을 역임했고, 당연히 차기 대권에 도전할 것이라고 여겨질 만큼 정치적으로도 비중이 있는 인물이었다. 그런 인물이 불현듯 갑자기 인생을 마무리하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는 점이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정치적인 비중을 떠나서 우리 사회에서 신뢰할 수 있을 손 꼽히는 인물 중 하나라고 여겨졌던 사람이기도 했다.

1980년에 사법시험(제22회)에 합격하고 검사로 임용된 이후 권세를 누릴 수 있는 상황이었음에도 그는 시민활동에 투신했다.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던 그는 1986년 ‘부천서 성고문 사건’의 변호인단으로 참여했고, 1993년 ‘서울대 조교 성희롱 사건’을 담당하며 6년의 법정투쟁 끝에 승소를 끌어냈다. 특히 ‘서울대 성희롱 사건’은 성희롱이 사회적으로 불법이라는 인식을 가져오게 되었다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 사건이었다.

1990년대 ‘경실련(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과 함께 중요한 양대 시민단체였던 ‘참여연대’는 권력에 대한 제도적 감시와 더불어 ‘국민생활최전선 확보 운동’, ‘재벌개혁을 위한 소액주주운동’, ‘부패정치인 낙천낙선운동’ 등 여러 가지 창의적인 시민운동을 전개했고, 그 중심에는 박원순이 있었다. 박원순이 사무처장을 맡았던 당시 참여연대의 활동력과 창의성은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키며 커다란 지지를 받았고, 당시의 참여연대는 다른 시민단체들과는 다르게 정부의 보조금이 없이 시민들의 후원금만을 가지고 운영할 수 있는 대한민국 유일의 시민단체였다는 점이 이를 보여준다.

참여연대라는 시민단체의 영향력보다 박원순이라는 리더의 영향력이 더 돋보이는 시점에서 그는 참여연대의 사무처장을 다른 활동가에게 넘겨주었다. 당시 박원순이 없는 참여연대가 가능할 것인가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적지 않았지만, 그의 사임을 통해 다른 시민활동가들이 보다 전면에 나설 기회가 생겼던 것이다. 이후 그는 ‘아름다운재단’, ‘희망제작소’ 등 참여연대의 활동과 중첩되지 않는 새로운 영역에서의 시민운동을 진행하면서 시민운동의 저변을 확대하려고 노력했고, 동남아시아의 시민사회와 국제적인 연대와 활동을 통해 국제시민사회의 역량을 강화하려고 힘쓴 것으로 알고 있다.

평생 인권운동 및 시민운동에 투신하던 그가 정치의 전면으로 나서게 된 것은 2011년의 일이었다.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 사퇴를 한 이후 보궐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시 여당이던 나경원 후보를 누르고 서울시장에 당선되었던 것이다. 후보 등록 당시, 산행을 마치고 내려와서 당선이 유력한 서울시장후보였던 안철수 씨와 독대를 통해 양보를 받아냈던 일화는 적지 않은 반향을 일으켰다. 양보를 해 준 안철수나 양보를 받아 낸 박원순이나 모두 범인은 아니라는 평가가 적지 않았다. 이후 박원순 시장은 재선과 3선을 통해 최장기 재임한 민선 서울시장으로 이름을 올리고 있던 중이었다. 3선을 마지막으로 이후의 행보가 적지 않게 궁금했는데, 그 이후의 행보를 볼 수 없게 된 것도 아쉽게 다가왔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시정활동에 커다란 지지와 응원을 보내주었던 것이 한편으로는 시장으로서의 창의성과 열정에 기반한 것도 있을테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가 일구어 왔던 이와 같은 ‘그의 삶에 대한 신뢰’도 중요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그의 삶이 많은 것을 기록하고 증명하고 있다고 믿던 찰나, 이 세상을 달리 했다는 그의 소식과 그와 관련한 추문은 사람들에게 당혹스러움으로 다가오는 것 같다. 어쩌면 우리가 지금 어쩔 줄 몰라하는 것은 그에 대해서 가졌던 신뢰에 대한 배신감과 허무함으로 황망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황망함을 뒤에 두고서라도 여전히 남는 불편한 응어리가 마음속에 조금 남아있는 것 같다.

 

‘아무리 그래도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할 필요가 있었을까?’

 

정치인들의 추문은 하루이틀의 일이 아니다. 윤창중 전 청와대대변인(박근혜 정부) 성추행 사건, 박희태 전 국회의장의 캐디 성추행 사건,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의 비서 성폭행 사건, 오거돈 전 부산시장의 여직원 성추행 사건 등 2000년 이후에도 이런 일은 숱하게 벌어졌다. 박원순 시장도 다른 이들처럼 언론에 사과하고 재판에서 법의 심판을 받으면 안 되는 것이었을까? 법의 이름으로 심판을 받고 그 앞에서 속죄를 하면 안 되는 것이었을까? 그는 왜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했던 것일까?

 

그가 삶을 마무리하면서 이에 대한 해명을 들을 수 있는 방법은 이제 그 어디에도 없다. 그가 죽음을 통해 찍어 놓은 마침표는 그의 죽음에 대한 해명에 대해서도 마침표이고, 그가 평생을 통해서 했던 이야기들과 그가 앞으로 하고자 했던 이야기들도 모두 마침표인 것이다. 만약 그가 마침표를 찍지 않았더라면 그가 세상 사람들 모르게 저질러 놓았던 인생의 과오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가 만들어졌을 것이고, 마찬가지로 그가 삶을 통해 이룩했던 적지 않은 성과와 업적들 모두 다른 방향에서 해석되고 재평가되었을지도 모른다.그렇다면 그가 지금까지 살아왔던 그 삶의 무게가 한순간의 신기루로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남들과는 다르게 언론이나 법정에서의 몇 마디가 아닌 죽음으로써 속죄를 했었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언젠가부터 너무 많은 정치인들을 잃어버리는 것 같다. 나의 20대에는 한 명의 용감한 전직 대통령을 잃었고, 나의 30대에는 한 명의 멋있는 국회의원을 잃었다. 그들에게 어떤 잘못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들이 죽음을 선택했던 것이 너무 슬프고 서러웠던 기억은 있다. 그러나 지금은 이전과는 조금 다른 감정이 들락거린다. 정황으로 보았을 때 박원순 시장의 추문은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만약 사실이 아니었다고 하면 그가 굳이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할 필요는 없지 않았을까? 혹은 그 이면에는 또 어떤 문제가 있었을까? 어쨌든 그의 죽음이 슬프지만 서럽지는 않고, 안타깝지만 배신감이 느껴지는 복잡 미묘한 감정에 휩싸이게 된다.

 

글 말미에서 밝히지만 ‘좋아했고 많이 의지했던’ 어떤 정치인이 불미스러운 과오로 생을 마감한 것은 사실이다. 단지 내가 바라는 것이 있다면 그를 죽음으로 내몰았던 그의 과오는 명확히 하더라도 그가 죽음으로써 증거한 그의 나머지 인생은 세상 사람들이 건드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너무나도 아쉽지만 어쨌든 나는 어제 한 명의 시장을 잃게 되었다.

 

백선엽 장군에 대한 논란이 있다. 1920년생 백선엽 장군이 2020년에 100세를 넘긴 상황에서 그가 죽었을 때 어느 곳에 묻힐 것인가에 대한 논란이 바로 그것이다. 한쪽에서는 6.25 전쟁에서 북한의 침략을 막아내고 전공을 세웠기 때문에 국립묘지에 안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고, 다른 한쪽에서는 해방 이전 일본군(간도특설대)에 복무하면서 독립군을 토벌하는 데에 앞장을 섰으므로 국립묘지에 안장할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사실 이 문제가 논란이 되는 것이 백선엽이라는 개인이 중요한 인물라서가 아니다. 백선엽이라는 인물의 ‘역사적 행보’에 대한 평가가 ‘대한민국의 역사에 대한 평가’와 그 궤를 같이하고 있기 때문에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백선엽 장군이 해방 이전 만주의 간도특설대에서 활동했다는 것은 이미 밝혀진 사실이다. 1938년에 창설된 간도특설대는 만주로 이주한 조선인들로 구성된 부대였으며, 이 부대의 창설 목적과 주된 활동은 항일무장세력(주로 동북항일연군)에 대한 탄압이었다. 박정희, 신현준, 김석범, 김대식 등 한국 근현대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인물들도 간도특설대의 구성원이었다. 이 간도특설대의 만행에 대해서는 많은 역사자료 및 저술 등에서 다수 확인할 수 있다. 간도특설대의 모든 구성원과 모든 만행을 고발할 수는 없겠지만, 간도특설대에 복무한 자는 장교부터 사병까지 전원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다는 점을 이해한다면 이들이 민족의 독립과 해방에 어떤 역할을 했었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참고로 일본군에 복무한 자는 소좌 계급 이상의 자만 등재를 해놓았다).
백선엽은 해방 이후 조만식의 비서로 활동하다가 월남하여 군사영어학교 1기생으로 입교한다. 1946년 임관한 백선엽은 1950년 1사단장으로 취임하였다. 백선엽의 전쟁수행능력과 전후 대한민국에서 그의 역할은 적지 않았던 것 같다. 그는 치열했다고 알려지는 다부동 전투에서 제1사단장으로서 부대를 적극적으로 지휘했고, 그의 부대는 인천상륙작전 이후 평양에 입성한 첫 번째 부대가 되었다. 백선엽은 1951년 지리산 빨치산 소탕을 위해 야전사령부를 구성하는데, 이를 모태로 한국군 2군단을 창설하게 된다. 1952년 32세의 나이로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되었고, 1953년에는 대한민국 국군 최초로 4성 장군으로 취임하게 된다. 1960년에 퇴역한 백선엽은 대만, 프랑스 대사를 역임하고, 이후 박정희 정권에서 교통부 장관을 지냈다. 경제계에서의 활동도 왕성해서 충주비료 사장, 한국종합화학공업 사장, 한국에탄올 사장, 비료공업회 회장, 한국화학연구소 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그의 일대기를 보고 있자면 그가 가지고 있는 개인적인 능력이 뛰어나다고 평가할 수밖에 없어 보인다. 어쩌면 시류에 영합하는 것도 능력일 것이고, 전쟁에서 보여준 군인으로서의 능력도 뛰어난 것으로 보인다. 전쟁 중에는 진급이 빠를 수밖에 없다는 점을 아무리 고려한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젊은 나이에 빠른 진급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은 그의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다. 어쨌든 그는 대한민국 최초의 대장이 되었고, 전쟁 이후에도 외교관과 경제인으로서 폭넓은 활동을 보여주었다. 그는 국내에서 금성태극무공훈장, 을지무공훈장, 충무무공훈장, 금탑산업훈장을 받았고, 미국의 은성무공훈장, 캐나다의 무공훈장 등 다수 포상을 받았다. 그는 다수의 무공훈장을 받음으로써 대한민국의 군인으로서 충분한 영예를 누렸다. 군에서 예편한 이후에도 그는 대한민국에서 높은 사회적 지위를 차지했고 국가의 원로로서 대우를 받았다. 위에 열거된 여러 사실들만을 놓고 보더라도 그가 대한민국에 대해 행한 기여는 이미 충분한 평가를 넘어서 상당한 보상을 받았다고 생각된다.
그의 공로와 기여가 상당한 보상을 받은 것과는 다르게 그의 민족적 배신행위에 대해서는 아직 적정한 평가를 받지 못한 것 같다. 해방 이후 반민특위가 무력화됨으로써 그의 과오가 단죄될 기회를 잃어버렸고, 한국전쟁 이후 남북의 극렬한 이념대립의 상황 속에서 그의 반민족행위에 문제제기를 할 수 있는 기회는 전혀 주어지지 않았다. 반세기가 지난 2009년 민족문화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 그의 이름이 등재된 것이 어쩌면 최초의 공식적 평가일지도 모르겠다.

그는 그의 자서전에서 이렇게 기술했다고 한다.

“우리가 전력을 다해 토벌했기 때문에 한국의 독립이 늦어졌던 것도 아닐 것이고, 우리가 배반하고 오히려 게릴라가 되어 싸웠더라면 독립이 빨라졌다라고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동포에게 총을 겨눈 것이 사실이었고 비판을 받더라도 어쩔 수 없다.”(위키백과 재인용)

비록 자신의 삶에 과오가 있기는 하지만 대수롭지 않다는 표현이다. 역사라는 큰 물결 앞에 자기의 부끄러운 삶을 해명하고 합리화하려고 시도를 했지만, 그렇다고 역사와 민족 앞에 당당할 수는 없을 터이다. 최대한의 선심으로써 해방 이전에 그의 행적에 대해서 용서를 한다고 하더라도, 그 전제는 그의 진정한 사과와 반성이 앞서야 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백선엽 장군은 반성은커녕 ‘비판을 받더라도 어쩔 수 없다’고 했다. 어떠한 속죄와 용서에도 불구하고 그 과오가 역사에서 지워지는 것은 아닐진대, 하물며 역사와 민족 앞에서 진정한 반성은커녕 어처구니없는 태도를 보며 참 뻔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한국전쟁을 치르고 냉전시대를 거치면서 ‘자유의 수호자’로서 지나치게 떠받들어진 감이 없지 않다. 보수를 자처하는 세력의 입장에서도 백선엽을 국가적 영웅으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로 다가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떠한 방법으로든 백선엽의 민족적 배신행위를 덮지 못한다면, 그와 유사한 행보를 보였던 박정희 전 대통령의 파묘까지도 거론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치적으로 보수를 표방하는 인사들에게 있어서 이것은 절대로 마주하고 싶지 않은 상황일 것이다.
백선엽이 인생의 말미에 이르러 국립묘지의 안장이라는 결과로 인생의 방점을 찍으려 한다. 그러나 속죄와 용서도 없는 그가 국립묘지에 안장될 수 있다고 하면 그것은 민족정기의 심각한 훼손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의 역사적 과오를 모두 씻어주는 면죄부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대한민국에 어떠한 공을 세웠다 하더라도,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은 대한민국이 민족에 반역하고 역사 앞에 사죄하지 않는 그에게 면죄부를 줄 수는 없는 일이다. 따라서 그가 대한민국의 국립묘지에 안장되는 일은 결코 정당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얼마 전, 정신없는 안철수 대표가 홍범도 장군과 백선엽 장군을 등치시켰다. 홍범도가 영웅이면 백선엽도 영웅이란다. 어떻게 대한민국의 리더가 되겠다는 자가 ‘민족에게 목숨을 걸고 총부리를 겨눈 백선엽’을 ‘민족의 진정한 영웅 홍범도 장군’과 등치 시킬 수 있는지 모르겠다. 오히려 (보수적인 관점에서) 공과 과가 분명한 김원봉과 백선엽을 비교하는 것이 더 적합해 보인다.
‘해방 이전 독립군을 탄압하며 민족에 총부리를 겨눈 백선엽’과 ‘일제가 치를 떨 정도의 독립운동을 하고 해방 이후 북한으로 들어간 김원봉’의 공과 과는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해방 이후 한국전쟁을 통해 같은 민족에 총부리를 겨눈 김원봉을 용서할 수 없다면, 해방 이전 민족의 독립에 평생을 바친 분들에게 총부리를 겨누었던 백선엽도 용서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한 평생을 부귀와 영화를 누리며 잘 살았다면 그것으로 만족하고 역사에서 조용히 퇴장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일요일 오전이 항상 수업을 잡아 놓았었는데,
이번주는 일요일 수업을 휴강처리 했다.
정신적으로 여유를 가져야겠다는 절박한 마음이 요즘 부쩍 느는 것 같다.

오전에 집에서 천천히 뒹굴거리다가 늦으막이 어디로 갈 것인지 찾아보기 시작했다.
여기저기 알아보다가 양주 모 캠핑장으로 향했는데,
도착까지 했지만 그닥 마음이 땡기지 않아서 주변의 다른 캠핑장을 알아봤다.
그렇게 도착한 것이 양주 해피 캠핑장이다.
캠핑장 초입에 우사가 있어서 약간 걱정이 되었지만
씩씩한 마음으로 캠핑장에 들어섰다.

일요일 오후에 와서 사람이 거의 없었고,
조금 지나니 사람이 하나도 없는 상황이 되었다.
전날 비가 와서 많이 추웠다는데 오늘은 추위에서 자유로울 것 같았다.
그래도 혹시 몰라 집에서 두꺼운 상하의 한 벌을 준비해오긴 했다.

직접 캠핑은 하기 싫고, 남이 쳐 놓은 놀이터에서 즐기기만을 원하는 칼사장이 도착했다.
지난주부터 캠핑은 찌개라며, 한 번 따라가면 찌개를 만들어 보겠다며 의욕에 불타던 칼사장이었다.

칼사장이 도착하고, 장작에 불을 지피고, (의사가 먹지 말라던) 맥주를 두 캔이나 부숴버리고, 밥과 찌개를 올렸다.
밥은 10분만에 완성되어 찌개를 기다리고 있었더니 칼사장이 바빠진다.
찌개가 완성될 즈음에 불판에 고기를 올리고 슬슬 식사를 시작했다.

식사를 할 때면 나이를 먹어감을 느낀다.
예전 같으면 밥과 찌개에 고기를 다 해치웠겠지만, 이제는 찌개도 남고 고기도 남는다.
남은 식재료가 아깝지만 어찌하겠는가?!

밥상을 살짝 정리하고 장작 옆에 앉았다.
밤은 점점 깊어지고 날도 조금씩 쌀쌀해진다.
집에서 챙겨온 두꺼운 옷 덕을 좀 본다.
술기운 탓인지 머리도 가볍게 아프고 졸음이 밀려온다.
칼사장은 아이패드로 잘 놀고 나는 잠을 좀 자고...

조금 자고 일어나서 칼사장이랑 설거지를 하고
칼사장은 다음날 출근을 위해 집으로 돌아갔다.
나는 남은 장작을 모두 태우고 새벽 2시 즈음에 텐트 안으로 들어갔다.

눈을 뜨니 오전 8시.
이제 텐트가 조금씩 따듯해진다.
밖으로 나가야 할 것 같은데 나가기 싫다.
점점 집에 돌아가야 하는 시간이 다가옴에 대한 심리적 저항이다.

시간이 흐름을 어쩌겠는가.
엉금엉금 기어 나와서 멍도 때리고, 핸드폰 게임도 한 판을 하고, 라면도 끓여 먹고, 커피도 한 잔 내린다.
괜찮은 드립백을 하나 구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도 없는 월요일 아침 캠핑장.
경기도 북부지역은 월요일 아침마다 천둥소리가 들린다.
지난 포천 국망봉에서도 비슷한 소리가 들렸는데, 아마고 포병의 포사격 훈련이 있는 것 같다.

월요일 오전에 캠핑장 청소를 한다.
청소하시는 분이 베트남 국적인 것 같은데 인상이 선하다.
강아지가 한 마리 따라와서 누워있길래 가서 인사를 했다.
베트남 분이 강아지의 이름을 말해준다.
‘해피-!!’

월요일이라고 오후 5시까지만 철수하면 된단다.
나도 그러고 싶지만 3시까지는 집에 가야 한다.
쉬는 시간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짧고 아쉽다.
매주 3박 4일 정도 캠핑장에 와서 누워있다 가고 싶..;;

이제 마지막 설거지도 하고 짐도 챙겨야 하니 부지런을 떨어봐야겠다.
이번 한 주도 열심히 살자!!

2020.05.25. 11:39

캠핑장 정보.
1박 40,000원. 장작 1다발에 10,000원.
아이들 놀이공간이 약간 있음.
캠핑장소가 3개 층으로 이루어짐.

#1 제일 위쪽(3층) 사이트 모습
#2 가운데 층 사이트 전경
#3. 아랫층 사이트 전경


개수대. 화장실은. 1층/3층에 있음.
나는 제일 위에서 자리 잡음.
개수대/화장실 가까워서 좋음.
따듯한 물(뜨거운 물) 콸콸콸~

 

 

화장실 및 개수대 건물(꼭대기층)
개수대 공간(내부모습)


화장실 벌래는 산에 위치했으므로 어쩔 수 없음.
오전 산 속 소쩍새 사운드 좋음.

조금 위에 절이 있음.
캠핑장 초입에 우사만 없으면 딱 좋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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